로타리 클럽
Rotary International District 3650

인연과 필연의 연속, 그리고 돌고 돌아 로타리
서울장충 로타리클럽 김형진
2014년 봄, 진도 앞바다.
제주로 향하던 인천발 여객선 한 척이 침몰했다. 당시 그 사건을 취재하던 모 방송국의 영상기자였던 나는, 사고 수습 현장에서 몇 주간 머물며 주야를 가리지 않고 현장 상황을 기록하는 데 매진했다. 당시 회사의 영상취재부장은 현장에 나가 있는 영상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이러한 큰 사건은 삼풍백화점 붕괴 이후 최대의 상황입니다. 모두 전력을 다해 취재하십시오.”
그 말은 격려이자 명령이었고, 현장에 있던 우리 모두는 그 무게를 온몸으로 감당하고 있었다.
이 일이 있기 19년 전인 1995년 6월, 나는 당시 살고 있던 동네에서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를 직접 목격했다. 온 국민이 안타까움과 슬픔에 잠겨 있던 그날, 어린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어깨에 커다란 쇳덩이 같은 카메라를 메고 현장을 누비던 방송국 카메라기자들의 모습이었다. 지금은 ‘영상기자’라 불리지만, 그때 그들의 모습은 한 소년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영상을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이후 나는 방황과 질풍노도의 시간을 거쳤다. 하지만 마음 한켠에서는 늘 그날의 장면이 나를 붙들고 있었다. 퓰리처상 수상집을 찾아 읽고, 사진전을 보러 다니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렇게 연극영화과 입시를 준비했고, 관련 학과에 진학할 수 있었다. 졸업과 동시에 방송사에 입사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 모든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비로소 실감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방송사 입사는 내게 꿈같은 일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이후 몇 년 동안 나는 깊은 방황의 늪에 빠져 있었고, 가정환경 또한 녹록지 않았다. 그 결과 1학년 시절 학업 성적은 매우 좋지 않았다. 교수진은 흔히 “예술대학 학생들에게 성적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지만, 내게 돌아온 평가는 달랐다. 나의 성적 앞에서는 의지와 열정보다 과거의 흔적이 더 크게 부각되었다.
그때 단 한 분의 교수님만이 늘 나를 믿어주셨다.
“너는 잘될 거야. 내년쯤이면 우리나라에 방송국이 많이 생길 것 같은데, 그때 꼭 한번 도전해 보렴.”
그 말은 당시 나에게 거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졸업을 앞두고 나는 국내 취업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고 해외 유학을 결심했다. 유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던 가게에는 자주 오시던 단골손님이 계셨다. 어느 날 그분은 내게 인근 방송국에서 직원을 모집하고 있다며 한번 지원해 보라고 권했다. 경험 삼아 원서를 냈을 뿐인데, 뜻밖에도 1차, 2차를 거쳐 최종 면접까지 가게 되었다.
최종 면접장에서 긴장된 상태로 자기소개를 마치고 심사위원들을 바라보는데, 한 위원이 나를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자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순간 나는 그를 알아보고 이렇게 답했다. “아, 저도 손님을 뵌 적이 있습니다.”
일순간 장내는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 심사위원은 바로 내가 일하던 가게의 단골손님이었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대학 선배이기도 했다. 그렇게 이어진 인연으로 나는 방송국에 입사하게 되었고, 대학 시절 나를 격려해 주셨던 교수님 또한 누구보다 기뻐하셨다. 이후 나는 영상기자와 뉴스 제작 PD로 활동하며 보도 현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2014년의 그 선박 사고는 내 인생의 거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몇 달간 현장을 취재하며 나의 마음은 점점 지쳐갔다. 매일같이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절규하고 오열하는 사람들을 렌즈로 담아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때로는 취재진을 향한 분노와 비난을 가장 앞에서 받아내야 하는 것도 현장에 투입된 영상기자들의 몫이었다. 그런 날들이 반복되면서 나는 점점 날카로워졌고, 결국 당시 만나고 있던 사람과의 관계마저 무너지고 말았다.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모든 것을 정리하기로 결심했다. 잠시 쉬고 오겠다는 마음으로 친지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향했다. 내가 처음 도착한 곳은 일리노이주 쿡카운티에 위치한 스코키라는 작은 도시였다. 시카고와 맞닿아 있는 위성도시로,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하숙을 하며 일주일의 절반은 주변을 둘러보고, 나머지 절반은 친지가 운영하는 호두과자 가게에서 일을 도왔다.
과자 가게의 일은 단순해 보였지만 결코 쉽지 않았다. 매일 아침 가게 문을 열고 계란 수십 판을 깨 반죽을 만들고, 밀가루와 버터, 설탕을 계량해 대형 믹서에 넣은 뒤 저온 숙성을 했다. 기계를 점검하고 예열한 후 앙금 상태를 확인하고, 캘리포니아산 호두를 깨고 다듬는 일도 내 몫이었다. 예열이 끝나면 쉬는 시간 없이 네 시간 동안 호두과자를 구웠고, 완성된 과자는 포장해 미국 전역으로 배송되었다. 나는 그 시간을 무념무상으로, 마치 수련하듯 버텨냈다. 그 과정에서 내 마음속에 남아 있던 상처와 기억을 조금씩 내려놓으려 애썼다.
어느 날 대량 주문이 들어와 배달을 나가게 되었다. 배달지는 에반스톤이라는 도시에 있는 사교클럽 같은 곳이었다. 그 건물은 유난히 높았고, 외벽에는 세계 여러 나라의 국기와 알 수 없는 문양들이 가득했다. 특히 선박의 키처럼 생긴 로고가 인상적이었다. 당시 나는 그곳을 단지 규모가 큰 사교클럽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 건물의 이미지는 오래도록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이후 나는 다시 방송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미국의 한 방송국 채용에 도전했고, 두 차례의 시도 끝에 입사하게 되었다. 다시 돌아가고 싶었던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회사는 이후 서울 지국 근무 기회를 주었고, 나는 지금까지 그 길을 이어오고 있다.
2022년 가을 어느 날, 대학 시절 은사님께서 연락을 주셨다.
“형진아, 오늘 전직 대사님 강의가 있는데 한번 와서 들어볼래?”
강연장에 도착해 보니 연단 옆에는 ‘서울奬忠 로타리클럽’이라 적힌 오래된 깃발이 놓여 있었다.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로타리를 만났다. 몇 차례의 초대 끝에 송년회까지 참석하게 되었고,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로타리안이 되어 있었다.
2023년 1월 5일, 배성례 전 회장님께서 직접 내 가슴에 로타리 배지를 달아주셨다. 이후 일본 도쿄 고가네이 로타리클럽 창립 60주년 행사에 참석하며, 대를 이어 봉사하는 로타리의 정신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그 경험은 내 로타리안 생활에서 잊을 수 없는 장면으로 남아 있다.
그러던 중, 로타리에 대해 공부하던 나는 국제로타리 본부의 위치를 알게 되었다. 본부는 시카고가 아니라 에반스톤에 있었다. 지도를 통해 건물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말문을 잃었다. 과거 호두과자를 배달하러 갔던 바로 그 의문의 건물이 국제로타리 본부였던 것이다. 그때 보았던 선박의 키 모양 로고는 바로 로타리의 상징이었다. 나는 한참을 웃으며 생각했다.
‘아, 내가 로타리 활동을 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구나.’
그리고 앞서 나의 대학시절 내게 “너는 잘될 거야. 내년쯤이면 우리나라에 방송국이 많이 생길 것 같은데, 그때 꼭 한번 도전해 보렴.”하고 응원을 해주신 교수님이 바로 현재 우리 클럽의 총무를 맡아주신 배성례 전 회장님이다.
최근 나는 만 42세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내 삶의 모든 인연은 돌고 돌아 다시 이어졌다. 어쩌면 로타리의 로고처럼, 인연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 맞물려 돌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며칠 전 우리 클럽은 창립 35주년 주회를 성황리에 마쳤다. 많은 분들의 도움과 사랑 덕분에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 수 있었고, 선배님들께서 내주신 장학기금으로 탈북 청소년에게 장학금을 전달할 수도 있었다. 아직 나는 부족한 로타리안이지만, 앞으로는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힘이라도 로타리를 통해 세상에 보탬이 되고 싶다.
로타리를 더 사랑하겠다.
그 사랑은 선후배 로타리안과 이웃을 향한 마음에서 시작될 것이다.
나를 아껴주신 선배님들을 위해서라도 더욱 성실한 로타리안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끝으로 이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총재님 이하 지구 사무국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